간토 대지진의 발생과 피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의 수도권인 간토 지방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은 리히터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바 등을 포함한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이 지진은 일본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자연재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지진의 직접적인 결과로,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쿄의 약 44%, 요코하마는 80%가 소실되었으며, 파괴된 가옥만 약 29만 3 천동에 달했습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0만 5천 명을 넘어섰고, 전체적으로 99,331명이 사망했습니다.
가옥 파괴와 반파된 가옥 수도 엄청난 수준으로, 소실된 가옥 수는 447,128호에 달했습니다.
화재와 추가 피해
지진이 발생한 시간이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가정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지진으로 인한 건물 붕괴와 함께 불이 확산되면서, 도쿄와 요코하마를 포함한 많은 지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지진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자였으며, 특히 도쿄 혼조 육군 피복창 광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3만 8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조선인 학살
지진 이후, 일본의 군경과 무장한 민중들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1923년 9월 2일부터 6일까지 집중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유언비어와 학살의 원인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였습니다.
이 유언비어는 경찰에 의하여 유포되었고, 일본 민중이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사실 확인 없이 유언비어를 유포하였고, 일본 민중의 조선인 학살을 방조하다시피 하였으며, 이후 조선인 학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건을 덮어왔습니다.
자경단의 폭력
일본군이나 경찰의 주도로 간토 지방에서만 4,000여 개나 되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집단 폭행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코하마 지역에서는 형무소에서 죄수들이 풀려나며 자경단의 활동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경단의 집단행동으로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등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조선인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게 시켰으며, 한국어에는 어두에 탁음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행인에게 일본어를 말하게 하여 조선인을 식별했습니다.
학살의 규모와 피해
학살당한 조선인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본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수는 233명이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간지『독립신문』에 발표된 학살자 수는 6,661명에 이릅니다.
재일본관동지방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나가와현이 3999명으로 희생자가 가장 많고, 도쿄도 1781명, 사이타마현 488명, 지바현 329명, 군마현 34명, 도치기현 8명, 이바라키현 5명 등 총 6644명입니다.
학살의 여파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가 와와 아라카와의 두 강이 흘러 다니는 시체로 인해 피바다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일본 당국은 지진 발생 얼마 전에 조선의 3.1 운동과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은 대규모 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민중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조선인 학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대응과 책임
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 2일에 계엄령이 공포되었고, 군이 치안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사실 확인 없이 유언비어를 유포하였고, 일본 민중의 조선인 학살을 방조하다시피 하였으며, 이후 조선인 학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건을 덮어왔습니다.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1982년 만든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이 직접 발로 뛰어 작성한 자료집에는 목격자와 생존자의 증언이 다수 실려 있으며, 일본 정부의 관련 여부와 충분한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조사 의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교훈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은 일본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자연재해의 심각성과 사회적 갈등의 폭발을 보여주는 예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재난 대응 시스템과 사회적 조화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특히, 유언비어와 잘못된 정보가 어떻게 대규모의 인권 침해와 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1923년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역사에서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아직까지도 진상규명과 책임 물음이 필요한 사건입니다.
일본 정부와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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