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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조선의 명성황후 암살 사건

by best76 2024. 10. 8.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조선 왕비 암살 사건(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ÉE)>

배경 및 정세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암살 사건은 1895년 10월 8일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는 당시 조선과 일본, 러시아 사이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국외 정세

-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탈출시키면서,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 속에 놓이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하였는데, 이에 일본은 황후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국내 정세

- 조선 내부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었다.

박영효와 흥선대원군을 포함한 일부 개화파와 수구파는 황후의 권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특히, 박영효는 황후를 살해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 하였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

전개 과정


을미사변은 일본 주재 조선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계획과 준비

- 1895년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세부 계획이 세워졌다.

미우라의 참모 시바 시로와 극우 낭인 단체인 천우협, 현양사 등이 참여하여 계획을 수립하였다.

실행

-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미우라 공사, 오카모토 고문, 극우 집단, 일본 낭인, 일본군, 일본 순사, 그리고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을 습격하였다.

조선군 훈련대는 경복궁 주변을 강제 방비하는 동안, 일본인들은 왕의 침전까지 들어가 고종과 태자를 강제 구인하였다.

핵심 세력은 황후의 침전인 건청궁 곤녕합까지 들어가 명성황후를 잡아 끌어내려 시해하였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여러 궁녀들이 황후를 보호하려 하였지만, 모두 살해되었다.

시체 처리

- 일본인들은 황후의 시체를 칼로 찔러 시해한 후, 석유를 뿌려 불태우고 시체를 연못에 던졌다.

이 과정에서 황후의 시체에 대한 추가적인 능욕도 행해졌다.

결과


을미사변은 조선 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직후의 반응

- 사건 직후, 일본은 미우라 공사 등을 자국으로 소환하여 재판을 명목으로 하였지만, 곧 방면하고 천황의 치하를 받았다.

이는 일본 정부의 실권자들이 이 사건을 지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을미의병

- 황후의 암살로 인해 전국적인 의병들이 궐기하여 항쟁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파 정권은 붕괴되었고,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대한제국의 선포

-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단발령을 시행하였지만, 이는 전국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의의와 영향


을미사변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왕조의 몰락

- 을미사변은 한 왕조의 몰락을 예고한 사건으로,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며,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은 일본에 강제 병탄되었다.

민중의 항쟁

- 황후의 암살은 민중의 강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이는 이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민중의 자발적인 항쟁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운동은 친일파 정권의 붕괴와 고종의 피신을 가져왔다.

결론


을미사변은 조선의 역사에서 일본의 침략과 내부 정치 갈등이 교차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는 조선의 독립과 주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중요한 단계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