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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사물의 역사

일본 : 슬픈 성문화의 역사. 메밀소바 한그릇에 팔렸던 몸값.

by best76 2024. 11. 15.

https://youtu.be/DWtWOWZ_rm4?si=eXmZwfDpTGwd-UjN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설립한 에도 막부의 지배 아래, 무사 계층이 지배적인 신분제도를 가지며 운영되었다. 무사들은 최상위층으로 특권을 누렸지만, 평화로운 시대로 인해 전투의 필요성이 줄어들며 낭인들이 출현하고, 일부 무사 아내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요타카로 전락하는 등 사회적 취약성이 노출되었다. 이 시기에는 엄격한 신분제와 중앙집권적 막번 체제가 유지되었으며,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는 한편, 하층민들의 삶은 매우 어려웠다.

에도 시대와 무사 계층의 변화: 평화와 사회적 취약성


에도 시대,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운 지 10여 년이 지난 시기, 일본은 오랜 전란을 뒤로하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무사 계층에게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다.

무사 계층의 변화와 낭인


전국시대와 센고쿠 시대의 끝을 맞이한 후, 무사들이 기대할 수 있는 전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도요토미 가문과 그들의 잔존 세력들이 완전히 멸망하고,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많은 무사들이 주군을 잃고 낭인으로 전락했다.

낭인들은 전문적인 전투집단이었던 사무라이들이 직업을 잃고, 거리에서 칼을 차고 방황하는 상태로, 그 존재 자체가 사회의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취약성


낭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에도 시대 많은 낭인의 아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야 했다.

일부는 몸을 팔아 돈을 벌었으며, 이러한 여성들을 요타카라고 불렀다.

요타카는 밤에 활동하는 매라는 뜻으로, 에도 시대의 밤거리를 배회하며 성매매를 하던 여성들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무사계급은 상업이나 노동을 자존심과 위신에 어긋나는 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무사의 아내들이 생계를 돕기 위해 요타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여성들은 바느질이나 꽃꽂이, 다도화 같은 기예나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극단적인 일까지 해야 했다.

요타카의 삶과 경제적 상황


요타카의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여러 손님을 한밤에 상대하려면 충분한 식사를 통해 체력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열심히 돈을 벌어도 소바를 몇 그릇 먹으면 거의 남는 돈이 없었던 까닭에 자주 먹지는 못했다.

당시 요타카의 기본요금은 23문이었으며, 이는 곧 소바 1그릇에 몸을 파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로써, 에도 시대 하층민 여성들이 처한 극도로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위험과 보호의 부족


요타카의 손님층은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성격도 의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특히 밤거리를 배회하는 손님들 중에는 술에 취해 있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언제나 신변의 안전을 위협받고 있었다.

일부 요타카들은 폭력적이거나 돈을 지불하지 않는 손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시라고 불리던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장소에서 영업을 하였기 때문에 이런 위험 속에서 홀로 맞서야만 했다.

사회적 신분제와 취약계층


에도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가 시행되었으며, 무사 계급은 지배계층으로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낭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이러한 신분 체계에서 벗어난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에도 사회의 신분 체계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요타카들은 사회의 취약계층으로,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기본적인 생계에 사용해야 했기에, 수입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거나 보다 위험한 지역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었던 이들에게만 한정되었다.

대중문화와 사회적 대조


에도 시대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요타카들의 삶은, 화려한 번화가이자 당대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요시와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요시와라는 집과 고급 음식점, 우키요의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 그리고 가부키 공연장까지 갖춘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장으로 기능하며 사교 장소 역할도 수행했다.

반면, 요타카들은 위험한 밤거리를 배회하며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었다.

결론


에도 시대의 평화는 무사 계층에게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으며, 낭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극도로 열악한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취약성을 겪어야 했다.

요타카들의 삶은 당시 사회가 하층민 여성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의 대가는 너무나도 적었고,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에서 벗어나려 끝없이 노력했으며, 그들의 삶은 이제 역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 쉬는 의미로서 우리에게 전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