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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사물의 역사

신란, 일본 정토 사상의 극치

by best76 2024. 12. 20.

https://youtu.be/G4k6fwTuxTo?si=b2jhGwAnCgMywgMT

신란과 정토진종

신란의 배경과 초기 생애

신란(親鸞, 1173-1262년)은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개조로, 어려서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었습니다.

그는 4살 때 아버지, 8살 때 어머니를 잃고, 9살 때 히에이 산으로 출가하여 천태종 승려가 되었습니다.

히에이 산에서 20년 동안 경전 공부와 염불수행을 하며 불도를 닦았습니다.

호넨과 정토종의 가르침

신란은 후에 교토로 내려와 정토종의 개조인 호넨(法然, 1133-1212년)을 만나 아미타불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호넨은 말법 시대에 들어서기 때문에 현세의 수행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하며, 오직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치는 염불만이 중생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신란은 호넨의 이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며, 29살 때 호넨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신란의 활동과 가르침

신란은 호넨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으며, 특히 염불을 통한 극락정토의 가르침에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율을 어기고 대놓고 결혼을 하였고,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신란은 인간의 욕망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염불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결혼이나 계율을 지키는 것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유배와 포교 활동

1207년, 정토종에 대한 압력이 가해져 신란은 승려 신분을 박탈당하고 애치고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일반 백성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 염불에 대한 확신을 더하게 됩니다.

유배된 지 5년 후 사면되어 관동 지방으로 가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신란은 20년 동안 관동 지방에서 염불을 통한 극락정토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신란의 철학과 교의

신란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아미타불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악인도 아미타불의 구원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악인은 스스로를 구제할 힘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신란은 또한, 인간은 선과 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선과 악은 각자의 이익이나 정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염불만이 진실할 따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대와 영향

신란의 가르침은 후대에 의해 정토진종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 일부가 교의를 잘못 이해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신란은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노년까지 저술 활동에 집중하며, 잘못된 신앙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탄희초'는 당시 문제가 되었던 염불사상의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고, 신란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본의를 설명한 책입니다.

결론

신란은 일본 불교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특히 정토진종의 개조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말법 시대에 들어서기 때문에 현세의 수행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직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치는 염불만이 중생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약함과 죄를 인정하며, 아미타불의 도움에 의지하는 완전한 타력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며, 일본 불교의 특징적인 면을 보여줍니다.